지난 몇 년 간의 전시들을 보면, 이배는 조각과 설치에 큰 비중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4년 가을 대구 미술관 전시에서 작가는 여러 공간을 이 두 분야에 사용했다. 또한, 그 해 봄, Saint Louis에 있는 Fondation Fernet Branca에서도 동일한 시도를 하였다. 더 최근에는, 2015년 가을, 파리에 있는 Guimet 미술관에서 큐폴라 (둥근 지붕) 공간 전체를 같은 방식으로 사용했으며, 2016년 봄에는 두 가지 설치 작품을 하나는 Domaine du Kerguehennec 성당에, 하나는 Chaumont-sur-Loire 성 마구간 승마 경기장에 특별 제작했다. 하지만 놀랍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이 선택은 사실 당연한 회귀이며, 당연한 연속과 논리적 진화에 의한 것이다.
이배는 2000년대의 초반부터 지금까지 주로 아크릴 메디엄을 사용한 검은 색과 크림 빛 흰색의 대형 회화작품들을 소개해 왔다. 반면, 90년대 제작한 그의 작품들은 자주 전시되지 않았으며, 일부 작품들은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의 전작들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배는 그의 초창기의 재료들을 버리지 않았듯이, 그 작품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다만, 주 재료였던 숯을 다시 이용해 검은 먹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 숯의 시대 »라는 이름 아래 모을 수 있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엄청난 에네르기를 표출하는 작품들로, 작가의 작품활동 여정에서도 도불이라는 중대한 시점과 일치하며, 그가 새로운 소재 숯을 발견하고 이 마티에르를 사용하게 되는 결정적인 시점과 일치하기도 한다.
작가가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한 바대로, 1990년 그가 프랑스에 정착한 후, 숯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당시 우연히 그의 아틀리에 지척에서 헐값으로 판매하는 숯 포대를 발견한 것이 숯을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숯은 수묵과 서예의 세계, 그리고 상징적인 힘과 시적 감흥을 담고 있는 한국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은 작가 자신의 원천을 일깨워주는 마티에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숯은 그가 다루는 마티에르와 검은색이라는 두 주제를 한 곳으로 수렴하며, 이 둘을 결합시켜주는 재질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숯은 작가 자신을 위한 마티에르인 동시에 검은색을 위한 마티에르였다.
이배의 작품 속에서 숯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 즉 생명의 농축물로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다양한 숯 조각을 사용하여 설치와 회화에서처럼 조각 작업을 하면서도, 가공되지 않은 천연 소재로부터 그 현존을 확인하고, 그 « 물리성» 위로 유희하며, 존재론적 차원을 일깨우고, 거기로부터 모든 양상을 추출해 낸다.
작가는, 조각작품의 경우에는 검은 재질에 볼륨을 부여하고 이를 압축하는 방식으로 숯을 다룬다. 설치작품의 경우에는 숯 뭉치를 바닥이나 벽에 배치하여, 마치 숯 덩어리를 폭파하여 산산조각으로 분해된 검은 파편들을 사방으로 퍼뜨리려는 듯이, 그리하여 별이 총총한 하늘처럼 주위를 온통 검은 별들로 뒤덮으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회화작품에서는 절단한 숯 조각을 나란히 놓아 접합한 후 표면을 연마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캔버스에 부착된 숯의 표면을 갈아냄으로써 작가는 각각의 숯 조각이 내는 각양각색의 검은 물결무늬 광택을 유희하여, 빛과 그림자의 모자이크 그리고 다양한 검은 광택의 모자이크를 창출해내었다. 그의 회화작품들을 보며 (혹은 다시 보며) 우리는 작가의 예술세계 속에서 한 단계와 그 다음 관계가 가지는 미묘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작가가 검은 색의 평면성에 대한 작업에서 검은 색의 깊이를 드러내는 공간성의 작업으로 넘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2000년대 초 이배는 숯이라는 재질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어느 날 그는 마치 퍼포먼스를 하듯, 혹은 해프닝을 연출하듯, 주변에 놓여있던 검은 숯가루와 숯덩이를 공중으로 던져버렸다. 어쩌면 숯을 연기로 날려버리려는 그만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날 이후, 그는 다시 한번 대단히 숙련된 테크닉을 발휘하며, 캔버스 위로 여러 겹 펼쳐 바르는 아크릴 메디엄과 검은 안료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아크릴 메디엄으로는 흰색이나 크림 빛이 도는 배경을 만들고, 검은 안료로는 공간 속 어딘가에 정지된 듯한 검은 형태를 만든다. 이 두 마티에르의 사용으로 하얀 색은 검은 색에 한층 더 커다란 힘, 밀도와 바이브레이션을 허용함으로써 충격적이게 한다. 숯 그림이 표면 효과에 보다 큰 의미를 두고 있는 듯하며 (그러나 이때도 표면 효과의 원천인 밀도의 원칙은 무시되지 않는다), 흑백 회화는 깊이라는 개념에 더욱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심연을 느끼게 하는 깊이의 표현은 뛰어난 표면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실재로 흑백 회화 작품들의 표면은 극단적으로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밀랍을 연상시키는 관능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이배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생각하는 마티에르 그리고 결코 서두르지 않는 작업방식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들은 무엇보다 우선 영적 탐구와 그의 작업에서 편재하는 시간의 차원, 즉 숯의 역사 자체에 내재하는 시간과 작가가 숯을 다루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것은 한 층 (혹은 한 겹)씩 칠을 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 (이는 캔버스라는 공간 속에서 시간을 정지시키는 방법이다), 한 층의 안료가 건조하는 데 필요한 시간 등 작품 제작의 각 단계마다 필수적인 시간이기도 하며, 검은 형태의 윤곽을 다루는 엄청난 정밀성 (순간의 지속)이 요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그의 작품에는 행위적인 요소나 즉각적인 요소가 전혀 없으며, 우연에 의한 것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오랫동안 데생을 통해 탐구한 결과물로서, 작가는 많은 숙고를 거쳐 종이 위에서 찾아낸 형태를 화폭 위에 정확하게 옮긴다. 이 화폭에서는 소용돌이를 연상시키고, 저 화폭에서는 폭발의 흔적을 연상시키며, 또 다른 화폭에서는 서예에 가까운 획, 곡선 혹은 부호들을 연상시키는 이 형태들은 오직 검은 색을 구현하기 위해서만, 즉 검은 색에 육체를 부여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상징적이지도 않고 구상적이지도 않은 이 형태들은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형태 자신, 자신의 검은 영토만을 반영하고 가리킨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검은 형태가 흰 바탕 속에서 공간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공간 배치의 평형은 최소한의 불균형도 용납하지 않으며, 형태들 사이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밀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검은 대륙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두 색의 만남이나 대치로부터 가능하기 때문이며, 검은 형태가 부상하고 전율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흔들리는 듯한 경계선 (반투명 흰색 바탕 위에 검은 형태의 윤곽선이 미묘하게 반사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검은 형태만을 보게 된다. 극도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은 형태, 놀라운 에네르기를 내포한 형태, 빛을 빨아들이며 동시에 우리의 시선까지 빨아들이는 믿을 수 없는 밀도를 가진 이 형태만을 볼 뿐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비밀과 이면을 가진 바닥 없는 우물과도 같고, 각자 스스로 볼 수 있는 만큼의 깊이를 볼 수 있으며, 스스로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의 현기증을 느낄 수 있는 심연과도 같다. 그것은 마치 천체물리학적인 의미에서 블랙홀처럼 극단적으로 단단한 마티에르로 이루어져 스스로를 압축시키는 검은 형태로, 검은색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가게 하는, 아니 검은색 저편의 그 어딘가로 끝없이 빠져들어 가게 한다. 이 모습은 이전의 숯으로 만든 작품들에서 이미 찾아 볼 수 있었고, 오늘 또 다시 보게 된다. 이 숯은 이배로 인해 그의 근원적인 문화 요소로부터 보편적인 언어로 변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