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의 현재는 기억입니다.”
“당신은 나의 기억 속에 계시지만 만물을 초월해 계십니다.”
— 어거스틴
대구 미술관은 ‘므네모쉬네’(Mnemosyne, 기억)라는 토양에서 자라난 국제적인 작가들, 타다시 카와마타(2012), 쿠사마 야요이(2013), 장 샤오강(2014)에 이어, 이배의 전시(2014. 9. 12-2015. 1. 25)를 개최한다. 1989년 도불한 이배(1956~) 작가는 파리를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00), 파리 한국문화원 작가상(2009), 한국미술비평가협회 작가상(2013)을 수상했다. 대구미술관 전시에 앞서, 그는 프랑스, 스위스, 독일, 3개국의 문화 예술이 왕성하게 교류되는 프랑스 생루이 시의 페르네-브랑카 재단 (Fondation Fernet-Branca)에서 개관 10주년 개인전(2014. 4. 13-8. 31)을 했다. 이처럼 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한국, 중국, 미국, 등 유수 미술관에서 40여회의 개인전 및 다수의 국제적인 비엔날레, 아트페어, 단체전 등에 참가했다.
대구 미술관의 ‘므네모쉬네’ 작가들
이배 작가의 전시가 대구 미술관(총 약 2300㎡)에서 개최된다. 필자는 이배의 전시 바로 직전에 장 샤오강의 ‘Memory+ing’ (‘기억의 풍경’, 2014.6.14-9.3)전이 개최 된 사실에 놀랬다. 작품 한 점에 100억이 넘는 작품을 그리는 중국 슈퍼스타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것에 놀란 것이 아니다. 그의 작업의 중요 모티브가 ‘기억’인데, 공교롭게도 이배 작가의 주요 마티에르도 ‘기억’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위상의 미술관에서 스타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앞의 전시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전시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기획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관람객들은 두 개의 전시를 비교하며 그만큼 더 풍요로운 감성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주의하지 않으면 이러한 연관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장 샤오강은 예술의 모티브로 ‘기억’을, 이배는 무형적 마티에르로써 ‘기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연성에 호기심을 가지고 대구미술관의 최근 국제적인 전시를 좀더 살펴보니, 2013년에는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가, 2012년에는 타다시 카와마타의 전시가 있었다. 이들 역시 ‘기억’과 깊은 관련이 있는 작가들이다. 쿠사마 야오이하면 물방울 무늬 그 자체가 예술적 모티브이자 마티에르이다. 이 물방울 무늬는 쿠사마 야오이의 시각적 기억(망막의 잔상)에 의해서 태어났다. 그녀는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은 물론 자신의 신체에까지 오버랩 되는 것을 보고는 그 때부터 빨간 꽃무늬를 단순화한 물방울 무늬를 그녀 예술의 유일한 조형적 모티브로 삼았다. 그녀는 이러한 물방울의 시각적 기억을 대구 미술관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오버랩시키고 있는 중이다.
2012년에 전시했던 국제적인 작가 타다시 카와마타는 사과로 유명한 도시 대구에서 옛날에 사용했던 나무 사과상자를 가지고 Mnemosyne in situ를 했다. 또한 그의 입체적 회화작품은 3차원적인 기억을 2차원적으로 재현한 것을 다시 3차원에 가깝게 복귀한 것이다. 이배도 기억을 설치작업을 통해 입체화하며, 회화에는 공간을 직접적으로 삽입하고 있다 (vide infra). 이제는 이배의 차례다. 그는 이번 대구미술관의 전시에서 도불 이후에 한 작업을 중심으로 데생 (연필, 호치키스, 숯), 회화, 숯 조각, 설치, 등을 보여준다.
데생 / ‘0도 해석 ’의 배신
작가의 개성이나 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데생이다. 이배 작가의 데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밑그림으로써의 데생이 아니라 유화나 조각처럼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데생이다. 그의 데생은 사용한 마티에르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연필 데생 / 문제 제기
똑 같은 크기(51 x 54 cm)로 된 여러 개의 액자가 벽에 나열되어 있다. 각각의 액자 한 가운데에는 연필로 정밀하게 스케치 된 쪼그라지고 주름진 오브제들이 하나씩 그려져 있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어 순간적으로 당황스럽다. 상당히 세밀히 묘사되었기에 실재하는 오브제이며, 어떤 과일을 재현한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하지만, 섣부르게 결론짓고 싶지는 않다. 인간의 뇌처럼 주름으로 가득한 한 작품에 오랫동안 눈이 머물며 어떤 과일이 저렇게 쪼글쪼글 할 수 있는지 상상해 본다. 시선이 그림 위로 계속 산책을 하다가 온전한 형태의 과일과 부딪힌다: “아! 감이구나.” 감이 저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마르고 부서지고 이그러지고 주름잡힐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건조해져서 피부가 쭈글쭈글한 사과는 흔히 보았지만, 감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이 감들의 각각의 초상은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감에 외부가 개입되는 과정(말라가는 과정)을 보여주나, 그 과정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는 않았다. 감이 시간의 개입으로 늙어가고, 공기와 습도로 인해 마르고 주름진 모습이다. 이러한 외부의 개입을 좀더 시각화하려는 듯 감 위로 혹은 그 주변에 바람처럼 공기의 움직임처럼 연필 선이 스쳐 지나간다. 또한 누군가 실수로 누런 액체를 쏟은 것처럼 얼룩이 져 있다. 이 얼룩은 작가가 감식초를 뿌린 것인데, 마치 세월의 얼룩처럼 고의적인 우연성을 제시했다.
제각기 강한 개성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감의 초상들이, 마치 서구의 성 안에 역대 성주들의 초상화를 쭈욱 나열해 놓은 것 같다. 아니, 성주들의 초상이라기보다는 삶의 무게와 시간의 잔인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고야 판화 속의 인물들 같다. 이 ‘감’(甘, 과일)의 초상을 통해 작가는 ‘감’(感, 감각)의 초상을 백과사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배치가 감(甘)의 온전한 형태에서 점차적으로 변형되는 순차적인 순서로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몇 번이나 다시 보면서, 관람객은 크로스 퍼즐을 하듯이, 머리 속에서 작품을 온전한 감에서부터 가장 형태가 변한 감으로 순차적으로 재배치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어느 정도 정리는 되지만 미결의 상태로 두어야하는 개운치 않은 기분이다. 이 작품은 감 한 개의 인생사를 다룬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감이 사용되었고, 온전한 감보다는 변형된 감을 더 많이 사용했기에 그 과정을 완전하게 추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작품을 여러 번 쳐다보니 처음에는 낯설고 이상했던 쭈그러진 감들이 탱글탱글하고 온전한 감보다 오히려 더 재미있고 풍성함을 느끼게 한다. 마치 천 년을 갈 듯 단단하게 지어진 깨끗한 신축건물에서 느낄 수 없었던 풍성함과 다정함을 오히려 폐허가 되어 주춧돌도 남아 있지 않은 고대 신전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뭘까?
곤충채집
거미, 풍뎅이, 하늘소, 등 9개의 곤충들이 거의 비슷한 크기의 패널 (약 50x40cm)마다 하나씩 스케치 되어 있다. 멀리서 보아도 어떤 곤충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가까이 갈수록 이 곤충들은 기묘한 느낌을 주는데, 관람객들마다 느낌이 천차만별이겠지만, 곤충에 예민한 관람객들은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보자마자 얼른 눈을 감고 되돌아 나오게 만든다. 하지만 잠깐 보았는데도 머리에 강렬하게 각인된다.
이 데생은 연필이나 목탄이 아니라 호치키스로 그려졌다. 패널 뒷면에서 호치키스를 찍었기에 앞쪽에는 패널이 찢어져 툭툭 튀어져 나왔다. 호치키스의 뾰족하게 튀어난 부분과 찢어지고 부서진 패널이 곤충의 표피나 털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호치키스는 곤충의 형태를 따라 집중되어 찍혀있고, 그 주변에 찍힌 호치키스는 곤충이 기어가는 자취나, 곤충의 부스러기, 공기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듯 하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왠지 서늘하고 묘한 기분을 주며 그 앞에 오래 머무는 것을 불편하게 만든다. 최근 현대미술에서 마커스 레빈(Marcus Levine)의 못이나 첸 춘하오 (Chen Chun-hao)가 무두못 (머리가 없는 못)을 박아 그림을 그리는 못 작품(nail paintings)들이 보인다. 그러나 호치키스 만을 이용한 작품은 아직 본 적 없을뿐더러 이로 인해 나무패널이 갈라지고 찢어지고 튀어나오는 효과를 이용한 것은 더더욱 본바 없다.
< Insect collecting >이 그 서늘한 적나라함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면, 같은 호치키스를 이용했는데도 < 풍경 Paysage >이나 < 의자 Chair >와 같은 작품들은 그 반대로 평화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이 작품들은 호치키스를 패널 앞에서 찍었는데, < Chair >의 경우에는 공기의 움직임이 모여 의자가 되고, 의자가 흩어져 공기 속의 리듬이 된다.
숯 데생
1989년 도불한 이배 작가는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목탄데생을 시작하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얇은 목탄에 만족하지 못하여, 아예 숯 덩어리를 사다가 숯데생을 개척한다. 모노톤의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라고 할 정도의 극사실적인 묘사부터 기하학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형태의 숯데생을 보여주고 있다.
추상의 형태 속에 구상을 숨기는 이배의 독특한 스타일이 보이는 < Dessin > (Charcoal on paper, 145 x 114 cm, 1997)에서는 검은 굵은 선이 종이 캔버스 위에 거침없이 가로로 혹은 세로로 그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몇 그루의 나무 같기도, 숲 같기도, 숲 속의 길 같기도, 굽이굽이 길이 저 멀리 원경으로 이어지는 풍경 같기도, 그리고 인체의 일부분 같기도 하다. 이 무겁고 강한 검은 선(나무) 뒤로 아침의 분무로 희미하게 실루엣만 있는 나무들이 보인다. 굵고 검은 선과 여백이 부딪히는 경계선에 목탄이 부서져 가루가 튕겨 나간 듯 숯 부스러기가 있다. 추상적 모티브와 여백, 내부와 외부, 현존성과 영원성이 부딪혀 깨어진 듯 이러한 부스러기는 이배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마티에르와 다양한 스타일로 그려진 이배의 데생을 보았다. 데생은 작가의 기본실력과 창의성의 풍부함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많은 현대작가들이 어시스턴트나 기계의 힘을 빌어 작품을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작가들은 롤랑 바르트의 “0도의 해석”에 입각하여, 자신들이 사용한 마티에르나 작업과정만 설명할 뿐, 작품에 대한 스토리나 감성적 해석은 온전히 관람객들에게 맡긴다. 하지만 이러한 “0도의 해석”을 원하는 작가들을 철저하게 배신하는 것이 바로 데생이다. 작가의 개성이나 생각이 그대로 폭로되고 작가의 체취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신체의 분비물”(이우환)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싸이 톰블리의 낙서 같은 작품에 관람객들의 마음이 녹아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육체적이고 유혹적인 손 맛 때문이다. 싸이 톰블리처럼 고상하지는 않지만 주체못하는 에너지가 넘쳐나면서도 어딘가 불안하게 만드는 바스키아의 낙서같은 그림 앞에 전세계 미술애호가들이 경의를 표하는 것도 작가의 몸이 거기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회화 / 인간의 조건 , 불연소된 대지에서
흔히 “숯의 작가”로 불리는 이배 작가의 화업은 그 만큼 ‘숯’과 관련이 있다. 그가 도불하기 전, 한국에서 추상작품은 숯이 되기 위한 불꽃 같은 화려함과 원색적인 다양한 색채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마치 단풍 가득한 가을 산에 불이 붙었다가 갑작스런 소낙비로 순식간에 꺼져버리고, 타버린 검은 나무만 남듯이, 도불 후의 작업은 놀라울정도로 단시간에 검은 모노톤의 작업으로 변했다. 이배가 한국에서 작업한 회화는 어찌 보면 현대 한국인들의 열정적인 심성과 분위기를 드러내는 듯 하다. 도불 후에는 파리의 독특한 멜랑꼴리(흑담즙병, 검은 색과 연관)한 분위기처럼, 화려한 불꽃은 내재화되고 불의 자취인 숯만 남는다. 짓이겨진 숯으로 된 두꺼운 작품의 무거운 물질성과 이를 뚫고 나오는 힘이 관람객에게 전달된다. 도불 이전과 도불 이후의 작품이 중간 과정 없이 너무나 빨리 전개되어 관람객들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지만, 바로 이 차이는 초기작품과 현재작품 사이에 발생했을 심성적 동요와 예술적 방황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동요와 방황만큼이나 강력한 힘과 에너지가 솟아나오는 것은 예술이 주는 보상이기도 하다.
하얀 캔버스에 두꺼운 숯으로 기하학적 모티브가 그려져 있다. 숯가루를 짓이겨 메디엄을 사용해 화면에 두껍게 붙여진 이 모티브는 때로는 화면의 일부분을 때로는 대부분을 채우는 사각형 같기도, 삼각형 같기도, 두꺼운 선분 같기도 하다. 모티브의 나머지 부분은 캔버스의 빈 공백 그대로 비워두었다. 멀리서 언뜻 이배의 기하학적 작품들을 볼 때는 하얀색 캔버스에 검은 기하학적 모티브를 그린 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Malevitch, 1879-1935, < Composition suprmatiste > 1910)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배의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는 말레비치나 몬드리안 유형의 그림에 의도적으로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형태와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같은 색조는 오히려 그 차이와 대비를 더욱 명료하게 드러낼 뿐이다. 말레비치의 네모는 누가 봐도 정확하고 완전한 절대주의적 모티브다. 반대로, 이배 작품의 모티브는 사각형 같기도 다소 각진 원 같기도 하며, 삼각형에서 한 쪽이 부서져 사각형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어정쭝하고 뭔가 모자란 듯 미완성인 듯,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여백과 부딪혀 부서진 모티브의 가장자리에 부스러기(잔재)들이 흩어져 있다.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이러한 “부스러짐”의 모습은 그의 데생(목탄, 호치키스)과 회화 등 그의 작업 전반부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 말레비치의 작품에는 작가의 개념이 화면에 절대적인 방식으로 투사되어 부서짐 없는 완벽한 경계선이 드러난다. 그의 네모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네모이며, 나머지 하얀 면은 여백이 아니라 네모를 품고 있는 더 커다란 하얀 네모이다. 반면에 이배의 작품에는 외부를 개입시키기 위한 노력이 숯과 여백을 나누는 그 경계선을 부수거나 흐리게 하면서 드러난다. 그의 기하학적 모티브는 처음부터 네모이기를 기꺼이 포기하고, 도형이기도 거부한다. 현대 미술에서 이처럼 경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작품들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마크 로스코의 애매한 경계, 프란츠 클라인 (< 악상그라브 >, 1955, Oil on canvas)의 어정쭝한 모티브 등이 그러하다.
이배 작가의 또 다른 회화 작품인 < Body Mass > 연작은 인체인 듯 풍경인 듯한 작품이다. 그는 숯을 화면 위에 짓이겨 아주 두껍게 두께를 담는데, 캔버스 옆쪽에서 보면 얼마나 두꺼운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거운 질감으로 인체를 연상시키는 < Body Mass > 에서 < Issu du feu >(조각, 회화)로 가는 단계는, 레온칠로 레오나르디 (Leoncillo Leonardi)의 다른 테라코타 작품들은 그렇지 않은데, 유독 < 성 세바스티아노 Saint Sebastien > (1961, collection Sargentini, Rome 테라코타)를 떠올리게 한다. (피에르 술라쥬의 붓질[혹은 스크래치]을 떠오르게도 하는 이 앵포르멜 조각은 레온칠로의 작품 중에서도 상당히 뛰어나다). 그 이유는 이배의 인체를 비유한 풍경 < Body Mass >는 테라코타 조각이나 세라믹 작품을 연상시키는데, 가뭄으로 갈라진 논밭을 연상시키기도, 세라믹을 구우면서 유약으로 인해 생긴 균열을, 혹은 오래된 소나무 껍질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배의 숯회화는 부조라고 할 수 있을만큼 입체감이 있으며, 그의 < Issu du feu >(조각)을 펼치면 레온칠로 조각같이 재구성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 Saint Sebastien >에서 성인의 몸을 분해하려는 듯한 화살을 상징하는 선분들이나 < Issu du feu >에서 숯의 흩어짐을 막고 있는 이배의 검은 고무줄의 대조성과, 조각과 회화를 넘나들고,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애매성도 그러하다. 이 작품들은 불에서 나온 흙(테라코타)과 나무(숯)를 마티에르로 사용하여 몸이 기억하고 있는 외부(자연)를 상징한다. 굳이 모리스 메를로퐁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신화와 종교 경전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다시 되돌아 간다. 사람의 몸은 결국 큰 몸(외부, 자연,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이배의 회화 < Issu du feu >의 화면 전체는 빈 공백 없이 숯으로 꽉 채워졌다. 크리스털이 단면마다 빛을 다르게 표출하듯이 화폭에는 수백 개의 단면이 각각 다른 빛을 표현한다. 검은 색의 깊음 위로 맴도는 빛을 보면, 피에르 술라쥬의 < Outrenoir >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 Outrenoir >와 < Issu du feu >의 차이점이 점점 더 크게 드러난다. 우선 마티에르에 있어서 술라쥬는 물감을 사용하고 이배는 숯과 메디엄을 사용한다. 유화 물감의 검은 색과 그 위에 떠도는 빛, 그리고 숯의 검은 색과 배어나오는 빛이 다르다. 술라쥬의 빛은 화려하고 찬란하고 강렬하여 눈이 부시지만, 이배의 빛은 은은하고 수줍다. 술라쥬의 검은 색은 빛을 밀어내고, 이배의 검은 색은 빛을 스며들게 한다. 또한 술라쥬의 빛은 일정하게 스크래치된 방향에 따라 율동하기에, 통일감과 조화된 리듬감을 준다. 반면에 이배의 빛은 그 단면의 방향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해서 전체적으로 볼때만 조화가 느껴진다. 술라쥬는 화면을 구분하는 선이 아주 명료한 반면, 이배의 < Issu du feu >에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술라쥬의 < Outrenoir >는 ‘빛의 유희’를 제외하고는 멀리서 보나 가까이 보나 동일하나 [술라쥬에게는 이 ‘빛의 유희’가 중요하다], 이배 작가의 < Issu du feu >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또 다른 무언가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상적인 그림이 점점 더 구상적으로 변해가며 나무 결 같기도, 나무테 같기도 한 모습이 아주 섬세하고 세밀하게 드러난다. 그의 조각 < Issu du feu >를 단면으로 잘라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이 회화의 이름이 조각과 같은 < Issu du feu >임을 짐작한다. 마치 불이 꺼진 캄캄한 방에 들어갔을때,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눈이 어둠에 적응됨에 따라 방 안의 물체가 서서히 보이는 것처럼, 이배의 작품에 눈(視覺)이 익숙해 질수록 점점 많은 것들이 보인다. 반면에 술라쥬의 작품은 전혀 빛이 없는 공간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할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광학적으로 볼 때, 모든 색깔을 다 흡수해야 검은 색이 된다. 동양에서 ‘먹’으로 모든 색깔의 뉘앙스를 품어내는 것과 같다. 많은 산수화가들이 다른 색으로 이러한 뉘앙스를 표현해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평생 검은 안료만 사용한 피에르 술라쥬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그림은 “모노톤이 아니며, 하나의 안료를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색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 바 있다. 이전까지, 검은 안료를 검은 색으로만 사용했던 것이 서구적인 방식이었다면, 검은 안료를 다양한 색으로 보이도록 한 것은 오래된 동양의 방식이었고, 피에르 술라쥬의 재발견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구에서 이처럼 검은 색에서 여러 색의 뉘앙스를 발견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동양 식의 여백도 재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서양식 ‘여백’은 단순히 비어있는 것을 의미했다면, 동양식의 여백은 “관계성으로 발생된 바이브레이션을 지니며 다른 세계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 이배 작가는 최근 회화 < 무제 Untitled >에서 새로운 테크닉을 사용하여, 여러 색의 뉘앙스를 지닌 검은색과 여백이 어떤 방법과 과정으로 재현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배 작가의 최신작품은 첫 눈에는 아주 단순해 보인다. 하얀 캔버스에 몇 줄의 두꺼운 선이 어정쭝하게 그려 진 것도 같고, 칼리그래피 같기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형태 같기도, 혹은 형태보다는 일종의 부호나 기호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작품에는 몇 개의 점을 아무 생각없이 찍어 놓은 것 같다. 그의 기하학적 혹은 기호적 모티브는 여전히 완벽한 형태를 거부하며, 매끈하지 않은 어설픈 선도 무언가를 표현하려다가 중간에 멈춘 것 같다. 혹은 검은 잉크가 한 방울 떨어진 것 같은 형태도 있는데, 잭슨 폴락의 드리핑 기법처럼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붓으로 정교하게 그려진 결과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림을 보면, 마치 화선지에 먹이 퍼진 듯 그렇게 모티브가 번진 것 같고, 모티브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기도, 혹은 잘못 찍은 사진처럼 초점이 흐릿한 것도 같다. 모티브가 캔버스의 화면 저 아래 있는 것 같기도, 표면에 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그가 메디엄(medium)이 섞인 숯가루로 모티브를 그린 후, 메디엄을 바르고,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모티브를 똑같이 다시 그리고 또 메디엄을 바르는 과정을 세 번 반복하면서 발생된 효과다. 그 결과, 이배 작가의 작품에는 공간적 두께와 시간의 지층(地層)이 발생한다. ‘공간성’과 ‘여백’을 일반적인 회화에서처럼 2차원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서 3차원적으로 삽입한다. 그는 모티브 사이에 투명한 메디엄을 끼워 공간을 표현함으로써, 2차원적 평면에 3차원적 공간을 실제로 삽입한다. 이로 인해, 조각이나 건축에서만 가능했던 3차원적 여백 혹은 공간이 회화에 도입된다. 즉, ‘회화의 조각’ 혹은 ‘회화의 건축’이다. 타다시 카와마타는 ‘회화의 건축’을 명료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면, 이배는 회화 속에 공간을 실제로 삽입하여 은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같은 일을 반복할 때는 좀더 명료하고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배는 같은 모티브를 세 번 반복하여 그리면서 이를 더 명료하고 확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 혹은 기호적 모티브의 가장자리, 즉 모티브와 여백의 경계선을 오히려 모호하고 흐리게 한다. 이전까지는 이배가 경계선을 모티브와 여백의 부딪힘에 의한 부서짐으로 표현했다면, 최근 회화 < Untitled >에서는 반복을 통한 모호함으로 경계선을 부서트리고 있다. 가상세계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지리적으로도 세상의 경계선은 점점 모호해지고 양의적이 되며, 세상을 표현하는 언어도 그렇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고, 쟈크 라깡은 ‘의미하는 것’ (signifiant 기표)과 ‘의미되는 것’ (signifi 기의)은 영원히 미끄러지면서 분리된다고 한다. 이배의 < Untitled >의 세 층의 모티브는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어 하나인 것처럼 마치 동일자의 세계를 나타낸 것처럼 보이지만 성질 급한 관람객의 착각일 뿐이다. 반대로, 이 모티브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공간(메디엄)이 있어서 이 세 개의 모티브는 “부유하는 기표”(“significant flottant”)와 “미끄러지는 기의”처럼, 혹은 ‘말’과 ‘사물’처럼 결코 만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자아와 타자와의 사이도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분리되기에, 어떤 이유로도 타자는 동일화될 수 없기에 ‘절대적 타자’로 남게 된다 (cf. 엠마누엘 레비나스).
조각 / 기억의 계보 학
목탄 데생에서 검은 선들을 뚝뚝 잘라 묶은 듯한 조각연작 < Issu du feu >가 있다. 숯이 되기 전의 나무 모양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통나무 숯은 검은 고무줄에 의해 묶여져 있다. 나이테를 셀 수 있을 만큼 자연에 있었을 때의 원래의 나무 모습을 짐작할 수도 있고, 나무를 자르며 생긴 자국도, 숯이 되는 과정에서 갈라지고 터진 흔적도 남아있다. 이러한 통나무숯 수십 개가 검은 고무줄에 묶여 한 덩어리가 되어 전시장에 세워져 있거나 눕혀있다. 특별한 형태를 지향하지 않은 이 숯 조각들은 검은 고무줄에 의해 일부는 팽팽하게, 일부는 여유 있게,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축 늘어져 있는 형태로 여러 번에 걸쳐 묶여있다. 우리는 이미 같은 이름의 회화 작품을 위에서 보았는데, 이 조각의 한 단면을 여백 없이 표현한 것이 회화 < Issu du feu >이거나, 아니면 이 회화를 입체화 한 것이 < Issu du feu > 조각이다.
숯은 알타미라, 라스코, 쇼배 동굴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류 최초의 감성을 표현하게 한 가장 근원적인 예술적 마티에르다. 이러한 숯은 동양에서는 꾸준히 예술과 문화를 위한 주요 마티에르였는데, 바로 글과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먹을 만들 때 숯이 필요했다. 나무를 태워 만든 숯 그을음과 아교를 섞은 것이 바로 먹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에도 여전히 데생을 하기 위해 목탄이 사용된다. 이처럼 나무와 숯과 연관된 오랜 기억의 덩어리들을 연결시키려는 듯, “기억의 파편들”을 모으려는 듯, 이배 작가는 숯을 여러 개씩 모아서 묶어 놓았다. 이러한 거대한 기억의 덩어리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이배]는 어떤 문화적 충격도 없이 시골에서 마치 냉이 자라듯이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니, 내 자신에게 풍부한 상상력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에 필요한 창의력의 근원인 상상력을 외부에서 끌어들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오래된 기억을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내 속에서 다시 끄집어 낸다.”고 덧붙인다. ‘감’, ‘곤충’들과 같은 작품은 이배 작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의 일부가 모티브가 되어 타국에서 그려졌다. 어린 시절 혹은 한국에 있었을 때의 “습관적 기억”이 프랑스에 와서 어떤 우연한 계기를 통해 “순수기억”으로 “생명적 도약”(lan vital, 앙리 베르그송)이 되었다. 감의 표정과 곤충의 적나라함에서 보여주었던 구체적이고 생생했던 기억에서 점점 더 오래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점점 정화된 형태의 기억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대표적인 현대작가로 피터 도이그와 대구에서 방금 전시를 마친 장 샤오강이 있다.
위에서 회화 작품 < Issu du feu >를 통해 피에르 술라쥬와 이배 작가의 작품 비교는 미술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외적 ‘유사성’ 비교라면, 데생 < Cheongdo, series of dried persimmons >과 고야의 인물 비교는 인상적 비교가 된다. 이외에도, 주요 주제를 동시간적인 조건에서 얼마나 다르게 표현됐는 지를 비교하는 내적 문화적 비교가 있다. 이는 한국음식, 프랑스 음식, 중국음식처럼 마티에르, 모양, 맛 등이 같지 않지만, ‘셰프의 컨셉이 요리에 작용되는 정도’를 주제로 세 나라의 요리를 비교할 수 있듯이, ‘문화적인 조건과 관련하여 현대예술에서 기억’이라는 주제로, 장 샤오강(중국), 피터 도이그(영국) 그리고 이배(한국)의 작업을 비교할 수 있다. 동시대에서 기억을 중요한 주제로 작업하는 세 작가들의 문화적인 ‘기억비교’이기도 하다.
피터 도이그와 이배의 경우에는 ‘기억의 안전거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허물어져 기둥만 남은 그리스 신전이나 반쯤 허물어진 중세 성터에서 부서져 사라진 곳에 영원성이 개입되듯, 실제로 명료했던 한 사건에 대한 기억도 시간의 흐름이나 무의식의 작용으로 조금씩 잊혀지고, 잊혀짐으로써 비워지는 공간이 형성되고, 그 공간에 외부가 개입된다. ‘기억의 안전거리’가 생기는 과정이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시간의 흐름으로 만들어진 ‘기억의 안전거리’ 덕분이다. 괴로움은 약화되고, 정열은 조정이 가능해 지고, 미움도 그리움으로 바뀌고, 사랑은 삶의 훈장처럼 남는다.” (심은록, 『비싼작가 10』) 그래서, 한 템포 후에 ‘기억’을 그리면서,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관점이 형성된다. ‘심성’적인 역원근법적인 방식이다. 현대미술에 고식적(高式的) 요소 중의 하나인 역원근법이 어색한 공간이나 불안한 감성을 빚어내기 위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재도입되고 있다.
이 ‘안전거리’를 위해, 피터 도이그는 캐나다에 있을 때는 런던을, 런던에 있을 때는 트리니다드를 그렸다. 도이그는 트리니다드에서 다른 나라의 풍경사진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트리니다드의 현실이 배어든다고 한다. 마치 런던 풍경의 그림을 캐나다에서 그릴 때, 런던이지만 동시에 캐나다의 분위기가 스며드는 것과 같다. 어거스틴이 말한 “과거의 현재”로서의 기억이다. 도이그는 기억의 풍경을 구상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배는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도이그는 이러한 기억의 상징으로써 ‘물과 관련된(수면, 눈, 안개, 등) 반사된 이미지’를 사용하며, ‘물(수면)’을 기억의 표현양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은 기체(수증기)와 고체(얼음)의 중간 상태이다. 반면에 이배는 ‘숯’을 기억의 표현양식으로 사용하는데, 이 숯은 나무를 ‘불완전 연소’하여 만든 것이다. 마티에르나 표현양식에서 이 두 작가는 구상과 추상만큼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기억의 본질적 특성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즉 두 작가 모두 고체에서 기체의 중간과정이나 연소 전의 물체와 완전연소의 중간체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체(현실, 역사)를 다루기에는 영원성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영원성을 바라며 너무나 오래 내버려 두면, 기억은 망각 혹은 무의식으로 들어가 기체처럼 증발되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배도 마찬가지로 ‘나무’라는 너무나 생생한 현실을 어느 정도 연소 시키되, 완전 연소 시키면 결국 한 줌의 재로 변하여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역사적으로 현실과 상상을 잘 활용하는 케이스가 고대는 서사시인들이며, 중세는 종교인들, 현대는 광고 마켓팅자들이다.] 피터 도이그는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최초의 공통물질(아르케)이자 서양 4원소 중의 하나인 ‘물’로써 오래된 기억과 신화를 섞는다면, 이배는 동양 오원소 중의 하나인 ‘나무’를 취했다. 더욱이 이 ‘나무’는 서양에서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고대 세계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메디엄’(medium 매개체)의 상징이었다.
피터 도이그나 이배와 달리 장 샤오강의 기억은 아직 ‘안전거리’가 확보되지 않았다. 2011년 북경, 장 샤오강(1958~)과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세계에서 잘 알려진 중국 4대 아방가르드 작가 중의 한 명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필자의 질문에, “나는 아방가르드가 아니며, 반대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작품도 개념(언어)적인 것이 되지는 않을것이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그의 회화의 대부분 인물들은 성별과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얼굴들이다.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그는 다시 한번 모두가 동일한 얼굴, 태도, 사상을 지녀야 함을 체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감성적 상처와 기억은 바랜 인물초상 위에 얼룩(흔적)이나 그림 일부분에 갑작스러운 어색한 색깔로 ‘다르게’ 표현된다. 흥미로운 것은 기억을 상징하는 이 중요한 얼룩이 이배의 ‘감’데생에서 감식초로 만들어낸 얼룩과 유사하다. 또한 장 샤오강의 작품에는 그림을 가로지르며 분할하는 불규칙적인 선들이 있는데, 이 선들은 마치 오래된 사진의 균열같기도 그리고 “기억의 파편들”을 조립해 놓은 것도 같다. 이 선들은 이배 작가의 < Issu du feu > (회화와 조각)에서도 보여진다. 이배의 조각에서 검은 고무줄(線)은 “기억의 파편”들을 묶고 있다. 또한 이배는 회화 < Issu du feu >에서 추상 속에서 구상을 보여 주었다면, 장 샤오강은 구상 속에서 추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두 작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보여줌에도, 기억의 기본적인 컨셉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장 샤오강의 기억은 비록 시간적으로는 오래되었지만, ‘기억의 안전거리’가 생기기에는 아직도 너무 생생해서 상처가 아물지 않은 현재적 기억이다. 장 샤오강의 대구 미술관 전시 제목인 ‘Memory+ing’이 정확하게 표현했듯이, 그의 기억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인(-ing) 기억이다. 공동체를 중시 여기는 공산주의에는 아직 외부가 없다 (지나친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외부는 없다). 그래서 추상이 되거나 언어로 개념화 되기에는 너무나 선명하다. 위에민준, 쩡판즈, 등 중국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비슷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장미셀 바스키아와 제프 쿤스를 비롯한 미국의 현대전후미술을 주도하는 대부분의 작가들도 ‘현실’과 ‘모던한 미국적 신화’가 섞인 기억을 재현하고 있다. 바스키아의 < 무제, 흑인들의 역사 >(1983)는 자신의 기억, 신화, 역사, 의학, 낙서 등이 한 화면 위로 장엄하게 펼쳐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에 제프 쿤스는 미국대중들의 과거의 이상적 대상이었던 뽀빠이, 막대풍선 꽃, 핑크 팬더, 진공청소기, 등 전형적인 미국의 대중적 노스탤지어와 디지털 신화를 말끔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작가들의 작업에 정신적 혹은 신체적 ‘기억’을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은, ‘기억’은 모든 예술의 어머니(토양)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총체적인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명의 뮤즈 여신들의 어머니 이름이 ‘므네모쉬네’ (Mnemosyne, 기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은 기억이라는 대지 위에 자라는 나무와 같은데, 그 뿌리는 종적으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횡적으로는 공간에 가지를 드리운다. 결국 모든 예술가들은 ‘므네모쉬네’ (Mnemosyne, 기억)의 자녀인 셈이다.
땅으로 쏟아지는 창백한 빛
땅으로 쏟아지는 창백한 빛
나의 목가(牧歌)를 정결하게 쓰기 위해
점성가들처럼, 하늘 가까이 눕네 …
굴뚝들, 종탑들, 도시의 돛대들
또 영원성을 꿈꾸게 하는 저 거대한 하늘 …
창공에는 별이, 창가에는 램프 빛이 켜지네
숯의 강은 하늘로 흐르고,
달의 창백한 황홀은 땅으로 쏟아지네
— 보들레르, “풍경”
이배 작가가 그의 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기억의 파편인 숯”을 피워 연기를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의 예술은 모호함, 흐릿함, 불안함을 깨운다. 그의 마티에르인 기억은 과거가 미래의 기대를 지닌 현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에 명료하게 구분된 과거일 수 없다. 이미 5세기에 어거스틴은 “기억은 과거 일의 현재”라고 역설적인 말을 한 바 있다. 또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나”(데카르트)도 나의 의지나 의식과는 달리, 내가 외부에 속해 있기에 불가능한 명제이다. 이러한 불확정성에 대한 깨우침은 현존성의 명료함과 절대성에 대한 착각을 어느 정도 ‘망각의 강’(lethe, 은폐)에 흘려버리고, 대신 모호한 영원성의 ‘탈은폐’(a-lethe-ia, 진리)를 요청한다. 고대 서구에서 망자가 레테(lethe 망각)의 강을 건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망자는 현존성을 완전히 잊게 되고, 인간으로서는 상상 불가능한 모호한 영원성으로 들어간다.
현재성과 영원성이 날씰 씨실처럼 잘 엮어있는 최고의 모델은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 전쟁이다(호메로스는 “기억”의 여신의 딸들인 뮤즈에게 기도하면서 48편의 대서사시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현재성(역사)만 있고 상상(신화)이 없었다면 트로이의 전쟁(사실)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프랑스 역사학자 폴 베인느의 주장이다. 현재성과 영원성을 신앙의 힘으로 ‘다시 이어주는 것’이 ‘종교’(religion < re-ligare > ‘다시 묶다’)라면, 지(知)적 사랑으로 다시 이어주는 것은 철학(philo+sophia)이며, 현재성을 미(美)적 기술(techne)을 통해 영원성과 소통 [고양]시키는 것이 예술(techne)의 역할이다. 다시 말해 현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제시이다. 이배는 이러한 예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외부에 널려있는 더 많은 기억들을 수집하기 위해 감성적 혹은 지각적 접촉점을 찾고 있다.
보들레르가 그의 “풍경”(vide supra)에서 일상성 속에서 초월성과의 소통을 열망하듯이, 현실성 속에서 영원성 (외부)과의 소통에 대한 열망은 이배의 “기억의 파편”인 숯을 통해 꾸준히 드러나고 있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며, 숯의 강이 하늘로 흐르고 있다고 상상한다. 돛대(굴뚝들과 종탑들)를 올리고 이 강을 따라 영원성의 하늘로 항해한다. 하늘로 흐르는 강(제의에서 희생제물을 태우는 연기)은 고대 세계에서 사람과 신, 땅과 하늘을 잇는 가장 활발한 소통 수단이었다. 고대 제사장이 제의를 위해 높은 장소에 제단을 세우듯이, 보들레르는 하늘을 읽기 위한 점성가가 되어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건물의 꼭대기 방)으로 간다. 땅에서 불(창문의 빛)이 켜지고 화답하듯이 하늘에서도 불(별)이 켜진다. 숲의 강은 하늘로 흐르고, 하늘의 창백한 달빛이 은총처럼 땅 위로 뿌려진다. 땅과 하늘의 소통이 이뤄진다. 이배의 작품에서도 숯의 강은 끊임없이 외부로 흐르고 있다. 철저한 이성적 비판주의자인 칸트도 일상성에서 초월성을 매일 밤 그리워했다: “내 머리 위에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 내 마음 속에는 도덕률이 있다”. 동양화에서 쉽게 발견되는 일상성 속에서 초월성 (영원성)과의 소통은 이백이 고개 한번 까딱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고, 고개를 숙이니 고향 생각이 난다.”(“정야사”) 그리고 이배는 오늘도 숯의 강 위로 기억의 배를 띠워 외부와 내부, 초월성과 내재성, 영원과 현실을 오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끊임없이 숯을 피우는 이유다.